세계 유명기타리스트들의 약력

카셀 | 2006.03.01 15:36 | hit. 23687

* 클래식기타 연주가 *


1. 근대 클래식기타의 아버지 타레가(Francisco Tarrega Eixea, Spain, 1852.11.29 -- 1919.12.5)


기타는 악기사상 가장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가진 발현악기이며 비엘라(Vihuela)→류트(Lute)→기타(Guitar)의 과정을 거치면서 개량, 보급되어 16세기경부터 기타음악은 시인 에스피넬(V.Espinel), 의사 아마트(J.C.Amat)에 의하여 발전되었고, 코르베타(F.Corbetta), 산즈(G.Sanz), 드.비제(R.de Visee) 등에 의해 더욱 찬란한 전고전시대를 형성하였으나 바이올린 등 궁현악기의 발달로 말미암아 기타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모레티(Moretti), 아구아도(D.Aguado) 등에 의하여 기타음악이 재현되면서 소르(F.Sor), 쥴리아니(M.Giuliani), 카룰리(F.Carulli), 카르카시(M.Carcassi) 등이 계속 출현하여 기타음악은 제1기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황금기 이후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피아노의 발달과 오케스트라의 확대, 바그너에 의한 오페라의 부흥으로 기타음악은 역사상 가장 쇠퇴현상이 일어나면서 기타는 단지 노래와 춤을 위한 반주나 일반 대중들의 오락악기로서 다루어져 왔다. 예컨대 슈베르트는 피아노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는 가곡의 반주로 피아노 대신 기타를 대용으로 쓰곤 했던 것이다. 그후 많은 관심있는 음악가들이 기타의 연주법의 개발에 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타는 대규모 연주홀에 부적합하다는 근본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으며 기타 음악의 작곡도 그 기술적인 화려한 면에 늘 묶여 깊이 있는 곡이 나오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이때 스페인에서는 현대 기타음악의 시조이며, 기타의 로만시대를 장식한 거봉이며, 기타의 "사라사테"라는 절찬을 받은 프란체스카 타레가(Francisco Tarrega Eixea)가 1852년 11월29일 스페인의 바렌시아주 카스텔론의 빌라레알에서 한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레가는 8세 때 맹인 기타리스트인 마누엘 곤잘레스(M.Gonzales)에게 최초로 기타지도를 받고 이어 훌린안 아르카스(Fulian Arcas), 토마스 다마스(T.Damas)에게 사사하였다. 타레가는 한 후원인의 도움으로 바렌시아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브리아나로 가서 기타교수 생활로 가난하게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브리아나의 재벌을 만나 마드리드 국립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고 1875년에는 콩쿨에서 1등을 획득했으며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그 후 타레가는 기타리스트로서 마드리드에 데뷰한 후 스페인은 물론 런던, 파리, 스위스 등을 연주여행 했으며, 기타의 "사라사테"라는 절찬을 받았다. 그는 기타에 관한 일관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공부한 그가 기타에 전념하게 된 것은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하고 부터였다. 기타의 어떤 모습도 타레가가 이 악기로부터 회의를 품도록 만들지 못했다. 마드리드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타레가는 그곳 알함브라극장에서 기타연주회를 성공적으로 가졌으며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전국 주요도시의 순회 연주회에서 타레가 특유의 신선하고 독특한 연주를 하여 절찬을 받았다. 1881년에는 파리, 런던 등지에서 연주, 귀국후에는 스페인 전역에 걸쳐 연주여행을 가졌고 결혼하여서는 바르셀로나에 정주하였다. 타레가는 겸손, 온화, 학구적인 성격으로 그는 화려한 스테이지에서 멀리하는 한편 기타 예술의 탐구를 위한 엄격한 수도자의 생활을 하였다. 타레가가 이룬 많은 업적 가운데 일부는 기타로 하여금 그 소리가 더욱 맑게 울려 퍼지도록 한 것과 기타의 울림에 풍부한 색채감을 준 것, 그리하여 복잡한 악곡들도 기타로 연주할 수 있게 한 것 등이다. 이 모든 업적은 기타의 주법 개발과 기타의 디자인 혁신으로 인해 가능했다. 타레가는 음색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타레가가 기타를 위해 손을 댄 작품으로는 기타자체를 위한 오리지널 작품과 모차르트, 하이든, 슈베르트, 베버 그리고 바그너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편곡작품이 있다. 이 위대한 기타음악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대단한 개성과 스페인의 철저한 향토성을 감지하게 된다. 그는 투리나(Turina), 토로바(Torroba), 팔라(Falla), 빌라로보스(VillaLobos)로 이어지는 스페인 음악의 첫주자였다. 단순하고 명상적인 <전주곡>은 Lagrima(눈물)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마주르카의 두 제목은 여자의 이름을 나타내는데 그 특징은 틀림없이 음악에 비추어져 있는 듯 싶다. "13개의 전주곡", "알람브라의 회상", "아라비아 기상곡" 등 작곡, 편곡을 합해 300곡이상의 걸작이 있다. 타레가는 젊었을 때부터 지병인 안질로 계속 번민해 오다가 중풍이 발작하여 1919년까지 고생하던 끝에 그해 12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서거하였다. 타레가는 생애의 반을 손톱을 사용한 주법으로 연주했으나 자신의 손톱에 결함이 생겨 손톱없이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을 수개월간 연구끝에 개발하여 그후로는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연주회까지 손톱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타레가의 직계문하인 에밀리오 푸홀(E.Pujol 1886~ 스페인)은 타레가가 손톱없이 연주하게 된 원인은 타레가 자신의 손톱에 결함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살이외의 불필요한 물질을 사용하여 탄주하는 것보다 신경과 직결될 수 있는 살을 사용함으로써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대의 기타리스트중에서 타레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타레가가 존재하지 않았던들 지금의 기타는 진로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타레가는 종래의 기타연주나 작곡에서 철저한 개혁을 하였으며 아구아도 주법을 떠나 기타연주 기법의 백지상태에서 기타가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한까지 연구, 개척하였다. 왼손의 운지법, 오른손의 탄주법, 또는 음색, 음량의 풍부한 변화와 화음의 확충등, 수많은 업적은 우수한 문하생들에게 계승되어 20세기 기타 르네상스를 낳게 하였다. 금세기 초에 활약하였던 스페인의 저명한 음악가 루이스 미류트는 타레가를 찬양하는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작곡가로서의 타레가는, 페르난도 소르의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타의 진짜 위대한 면을 발견해낸 것은 타레가라고 생각한다." 현재 타레가의 유해는 출생지인 카스텔론에 안장되어 있으며 프라아나에는 타레가 일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상이 세워졌다.


2. Andres Segovia, Spain, 1893. 2. 28 -- 1987. 6. 3


많은 기타리스트의 이름 중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1893년 2월 17일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태어나서 1987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타의 선율을 좋아했고 10세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공부하여 기타를 시작한 지 4년만인 14세에 그라나다에서 데뷔하고, 1916년 마드리드의 아테네오 극장에서 정식 데뷔한 이래 1918년 중 남미 순회, 1924년 파리 데뷔 등 구미의 여러나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기타 음악의 보급에 힘썼다. 그는 기타의 약점인 작은 소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손톱과 살을 적절히 사용하는 주법을 개발하였고, 후에 많은 기타리스트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의 업적은 연주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많은 현대 작곡자들에게 자극을 주어, 많은 기타곡을 작곡하게 하였으며, 이는 현재 기타 레퍼토리 중에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세고비아 자신도 기타를 위한 작품으로 "5 Anecdotes", "Estudio sinLuz" 등의 작품을 클래식 기타의 레퍼토리로 확장시켜 기타의 연주회용 독주 악기로서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세고비아는 원곡을 살리면서 기타의 분위기와 이에 맞도록 재구성하는데 능했다. 그 중 바하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D장조 중 샤콘느의 편곡은 백미로 꼽히는데, 세고비아 자신도 자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에 하나가 샤콘느를 편곡하여 초연하였을 때라고 회고한 바 있다. 20세기 기타리스트 중에 세고비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고비아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는 현재 유명한 연주자들이 거의 세고비아에게 배운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 증명해 준다. 세고비아의 연주는 상당히 주관적이어서 개성이 강하고 낭만적이며 소리는 대체적으로 무겁다. 그의 음색은 보통 굵고 풍부하여, 잦은 비브라토의 사용으로 소리에 윤기를 띠기도 한다. 또한 그는 알아이레 주법을 사용할때는 살끝으로 줄과의 잡음을 최소화하며, 아포안도에서는 살과 손톱을 동시에 탄현에 이용하여 부드러운 소리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레코드는 1952년부터 1972년까지의 SP녹음이 일본 MCA와 미국 MCA에 의하여 CD 16개분의 전집으로 나와 있는데, 이 중 1957년까지의 연주는 Mono로 연주된 것이다. 이외에도 몇장의 음반이 EMI레이블로 소개되었다. 모두 그의 섬세하면서도 낭만적인 소리의 깊은 호소력을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1.세고비아의 제자들

세고비아에게 귀중한 레슨을 받은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결코 적지 않다. 물론 마스터 클래스에서 몇 번 레슨을 받은 것으로 제자라는 호칭을 써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기타란 악기가 어느 일정기간 동안 한 스승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아무래도 그 스승의 테크닉을 몸에 완전히 익히기 어려운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고비아의 제자라 할만한 인물은 다수이다. 유명한 인물들로는 존 윌리암스, 알리리오 디아즈, 오스카 길리아, 호세 토마스, 호세루이스 곤잘레스, 크리스토프 파크닝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세고비아의 기술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배워온 재능 있는 연주가들임에 틀림없다. 세고비아는 마스터 클래스의 경우에도 우수한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을 구별하여 특별히 출중한 생도 이외에는 그 레슨을 모두 조교역인 디아즈나 토마스에게 돌려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디아즈 자신도 술회한 바 있으며 레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곧 세고비아 자신이 지명한 우수한 생도가, 실은 세고비아의 레슨을 받기 전에 이미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디아즈, 토마스, 호세 루이스의 예를 들면, 그들은 다년간 세고비아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아왔으나, 그것은 그들이 그전에 사사받은 바 있는 사인즈 데 라마자의 지도 기간에 비해 10분의 1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놀라운 일인지 모르지만 이것은 다른 제자 기타리스트의 경우에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세고비아의 "진짜" 제자는 1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반면, 전술한 이들 제자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이들 제자들은 모두 다른 관점에서 세고비아를 술회하고 있다. 먼저, 세고비아를 존경하고 자신이 제자였음을 정말 기쁘게 생각하며 찬미하는 사람들로는 호세 토마스와 마쓰다 아끼노부가 해당될 것이다. 다음으로, 디아즈나 호세루이스의 경우인데, 이들 또한 세고비아의 업적을 찬양하는 동시에 은사로서의 세고비아는 그들의 또 한사람의 스승이었던 사인즈 데 라마자와 거의 동격의 평가를 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끝으로, 존 윌리암스와 파크닝의 경우인데, 이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추구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인물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항상 그들의 생각 속에는 세고비아의 풍조에 대한 "주저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2.세고비아의 연주 스타일

그러면, 약2회 정도 세고비아의 어드바이스를 받은 줄리안 브림과 예페스의 경우는 어떠한가. 브림은 세고비아를 존경한 인물이었으나, 세고비아의 연주 스타일을 따르는데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한편 예페스는, 오히려 세고비아를 관찰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길을 추구하여 성공을 거둔 예이다. 예페스의 연주, 특히 젊은 시절의 연주는 다분히 의식적으로 세고비아와 정반대의 음악 표현을 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그런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잘 알려진 연주가들인 마뉴엘 바루에꼬와 데이빗 럿쎌의 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거의 완전히 세고비아 주법을 부정하면서 출발하고 있다. 바루에코는 자신이 언명한 바가 있으며, 럿셀은 그 연주 스타일에서 안티-세고비아임을 증명하고있다. 그들은 브림이나 예페스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 반세고비아의 기치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러한 경향은 점차 강해지고 있는 듯하다. (연주 스타일면에서.) 그렇다면 세고비아는 정말 낡은 스타일의 인물인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연주를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 혹은 그가 남긴 방대한 레코딩을 접한 많은 수의 사람들은, 역시 세고비아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역시 세고비아는 "기타리스트" 이상의 "대예술가"라고 칭호를 받아야 옳지 않을까 싶다. 세고비아의 연주에 불만을 갖고 있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의 리듬과 독특한 세고비아류의 노래를 혐오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가 연주하는 곡은 악보를 보며 음부를 쫓아가며 듣는 그런 류의 연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의 연주는 그만이 해낼 수 있는 대예술가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고비아가 싫은 이유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의 연주의 훌륭함에 초점을 맞추어 보지 않으면, 결코 세고비아의 위대함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곡-사실상 하나의 장르를 이룰 만큼 많다-은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훌륭한 연주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금세기 초에 활약하였던 스페인의 저명한 음악가 루이스 미류트는 타레가를 찬양하는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작곡가로서의 타레가는, 페르난도 소르의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타의 진짜 위대한 면을 발견해낸 것은 타레가라고 생각한다." 타레가의 예를 들어 세고비아를 말함은 무리가 있겠으나, 이 문장 속에 나타나는 "기타의 위대한 면"을 실현한 것이 세고비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타라는 악기가 고유의 노래하는 기타의 음을 내지 않을 때, 그럼에도 기타라고 할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기타계에는 "향이 없는 커피"와 같은 상황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고비아는 그 자신이 기타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인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였다. 초월적인 테크닉, 독특하고 매력적인 톤, 이것들은 그의 신체의 거대함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손의 거대함과 관계가 있다. 그의 양손은 마치 글러브와 같아서 오른손의 지두는 충분한 압현이 가능했다. 그 결과는 매우 달콤한 음색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그의 왼손은 실로 은혜로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타를 지판상에서 압현할 때, 플렛 가까이에서 압현함은 상식이며, 어느 교본에나 언급되고 믿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실상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항이나, 세고비아의 경우는 그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사실상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매우 굵었으므로, 플렛중에 손가락을 대어도 플렛 가까이에 지두가 놓이는 효과를 내었기 때문이다. 또한 플렛 위에 손가락이 놓여도, 결코 찍찍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지두가 굵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전성 시대에, 연주회에서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던 사람은 세고비아 뿐이었다. 이런 점이 바로 세고비아의 신체상의 장점이었다. 크라이슬러는 "세계에는 참으로 위대한 현악주자가 두명있는데...이들은 카잘스와 세고비아이다." 라고 말했다. 세고비아가 한말중에 가장 인상깊은 것은 `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보다 감동을 주는것이 더 좋다.`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금세기 또 한사람의 유명 음악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기타 소리는 작지만 멀리까지 울린다고 했던 스트라빈스키의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세고비아 본인에게 꼭 맞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어떤 악기 하나에서 어떤 연주가 한 사람이 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낸 것이다.


3. Narciso Yepes, Spain, 1927 --


세고비아의 타계 이후 최고의 연주자로 각광받고 있는 연주자 나르시소 예페스, 그는 1927년 남부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4살에 기타를 가지게 된 예페스는 기타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 과 게오르그 에네스코(Georges Enesco)에게 리듬과 다양한 음색을 배우고 작곡과의 Asendo 교수를 만나 훗날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서 기초를 닦게 된다. Asencio 교수는 기타가 피아노와 같이 스케일이 균형과 속도감을 가질 수 없다면 기타라는 악기가 불완전한 악기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예페스에게 인식시켰다고 하는데, 이 때문인지 예페스의 기량은 피아노와 견줄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그를 세계적인 명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든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1952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금지된 장난"의 테마 음악(Romance)을 맡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클래식 기타 음악의 대명사로 알려진 "사랑의 로망스"의 연주는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안겨 준다. 예페스는 6현기타 대신에 자신이 개량한 10현기타를 사용한다. 이 악기는 낮은 E-Bb-Ab-Cb의 4줄을 첨가하여 만든 기타로 저음을 보강하고, 6현 기타가 가지는 정교함과 탄력성은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사각의 손톱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강하고 맑은 음의 탄현을 한다. 예페스는 악보에 충실한 연주로도 유명하며 레퍼토리나 레코딩 또한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다양하다. 800여년 전의 타블라추어나 기타의 전신인 류트나 기턴 등의 희귀한 악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해 주듯이 그의 연주는 우리나라에서 구하기가 쉬운 편으로 그의 HIT20이라는 음반은 클래식 기타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반이기도 하다. 그의 연주는 정확함과 자연스러움을 갖추었다고 평가되고 있는데 깔끔하고 선명한 음색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4. 줄리안 브림 Julian Bream, England, 1933.7.15 --


줄리안 브림은 1933년 7월 15일 런던 태생의 기타리스트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류트음악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온 그는 기타와 류트의 양면에 걸쳐 대가의 솜씨를 보여준다. 어려서 그는 아마추어 재즈 기타리스트인 아버지에게 배웠고 11세 때부터 러시아 기타리스트였던 알렉시스 체스나코프로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하여 12세에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주최하는 연주무대에 참가할 정도로 기량이 향상되었다. 그 뒤 그는 기타리스트 협회장인 페롯에게 러시아식 겸 이탈리아식 기타연주법을 사사받게 된다. 1947년 세고비아는 런던 공연을 위해 영국에 와 있었고, 브림은 페롯의 소개로 세고비아를 만나게 되었는데, 세고비아는 그의 연주를 듣고 즉석에서 그에게 적극적인 후원을 할 것을 약속하였고, 브림에게 레슨을 해주게 된다. 브림의 정식데뷔는 세고비아를 만난 해인 1947년 영국 첼튼햄에서 이루어 졌으며, 그의 데뷔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14세 였던 브림은 1948년 영국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기타리스트로서의 피아노와 기타작곡을 공부했으나, 당시 기타는 천대받고 있는 악기였기에 그는 거의 독학으로 기타를 배울 수 밖에 없었다. 1950년에는 런던에서 데뷔했는데 이후 전 영국을 통해 이름이 알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래식기타의 연주는 대중적이지 않아 브림의 성공적 데뷔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1950년 데뷔 직후 브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류트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곧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된 그는 연주회 프로그램에 덜 알려진 옛 음악을 적지 않게 삽입시키곤 했다. 엘리자베드 시대 음악에 관한 테너 피터 피어스와의 공동연구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바 있는데 버클리, 므리튼, 헨체, 티페트 등 주요 작곡가들이 그 영향을 받아 류트와 성악을 위한 작품을 썼다. 브림은 1954년 스위스에서의 연주회를 시발로 유럽전역의 연주여행을 시작했다. 1956년 브림은 빌라로보스를 만나는데 이를 계기로 빌라로보스 기타협주곡을 영국에서 처음 연주하기도 했다. 1958년 이후 브림의 시야는 미국 뿐만 아니라 극동 지역까지 크게 넓혀졌다. 줄리안 브림 콘소트(Julian Bream Consort)가 결성된 것은 1959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Moriey의 콘소트 레슨교본 1권을 연주하기 위해서 였는데 이 그룹의 성공은 르네상스 시대 콘소트 음악의 대중적 인기를 끌어모으는 부수적 효과까지 거두었다. 이를 지켜본 몇몇 작곡가들은 기타음악의 효용성을 깨닫고 작품을 썼으며 베네트의 쳄버 앙상블을 위한 볍주곡, 브리튼의 녹턴, 윌튼의 다섯개의 바기텔 등이 그렇게서 만들어졌다. 브림은 기타의 모든 레퍼토리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과 이해를 갖고 있고 그의 화려한 스타일, 밀도 깊은 음색은 그의 연주를 듣는 일을 하나의 감동적인 경험으로 승화시킨다. 1964년 브림은 OBE(Officer of the British Empire:서훈의 일종)로 임명되고, 1968년 서레이 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명성은 1976년 BBC TV에서 방송한 `A Life in the Country`의 방영으로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1976년에는 빌라로보스 골드 메달을, 1982년 가을에는 그의 연주생애에 대한 책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스포츠카 광이었던 브림은 84년 여름 티스버그에서 자신의 스포츠카를 타고 오크가에 있던 그의 집으로 향하던 중 급 커브길에서 그만 핸들을 돌릴 틈도 없이 석조 건물을 들이 받고 목숨보다도 소중한 오른팔을 못쓰게 되었다. 수술 후 그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연주자로서의 절정기에 그는 생애에서 가장 큰 시련을 맛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기교의 많은 퇴보를 가져왔고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여 기타를 기피하기도 했지만 성공적인 재기로 새로운 레퍼토리를 연주하기도 하고 음악적 해석은 더욱 탁월해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


5. John Williams, Austrailia, 1941 --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의 존 윌리암스는 4살때부터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 신동이었다. 아버지 밑에서 처음 10년간 공부한 그는, 1952년 런던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음악 세계에 있어 일대 전환이 된 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Accademia Musicale Chigiana di Sieria에 입학, 5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저 유명한 기타의 마법사 세고비아와 함께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어린 존윌리암스가 학생들 중 처음으로 독주회를 완벽히 개최, 전례없는 영예와 찬사를 한 껏 받게 된 것은 거장의 앞날을 말해주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1958년,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1한 그는 완벽한 테크닉과 그만의 철학적 세계로 음악을 구도,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1962년 소련과 파리,, 마드리드에서의 잇단 연주회는 존 윌리암스를 세계적 거장으로 올려놓는 시금석이 되었다. 1963년에 일본과 미국에로의 진출이후 그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져 전세계 어느 곳에든지 그의 음악이 흘러 나오게 되었다. 러시안 롯렛의 처절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 영화 `디어 헌터`의 음악(까바티나)을 맡으면서 그의 제2의 음악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줄리안브림, 파코 페냐, 이작 펄만, 배니 케설, 클레오 레인, 안드레 프레빈 등과 함께 연주 활동을 벌이며 그의 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안드레 프레빈과 같은 작곡가는 존 윌리암스 연주에 깊은 매력을 느껴 그를 위해 기타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최근, 패트릭 고어, 레오 브라우어, 토루 타케미츠와 같은 많은 작곡가들은 존과 더불어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곡을 많이 작곡하고 있다. 존 윌리암스는 음악의 최우선을 대중과 더불어 공감할 수 있는 것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같은 열정이 결실을 맺어, 저 유명한 런던 로니스코트 재즈클럽에서 연주회를 가진 최초의 고전 음악가가 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그는 1979년 급기야 5인조 그륩 `SKY`를 결성, 확고부동한 명성을 쌓게 된다. 그들의 연주 실황은 레코드와 TV를 통해 유명세를 더하게 되고 특히,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그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또한 최근에는 현대 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 새로운 그륩 `Attaccs`를 결성하였다. 존 윌리암스는 SONY CLASSICAL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20살때부터 정식 계약,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연주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대부분이 레코딩되어 끊임없는 호평을 받고 있다.


6. 클래식기타 최고의집안 로메로일가 Los Romeros, Spain, 1919 --


로메로 일가를 기타계에 있어서 가장 유명하고도 위대한 기타 가족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들 가족은 아버지 셀레도니오 로메로를 비롯하여, 장남인 셀린, 차남인 페페, 막내인 앙헬과 앙헬의 아들인 리토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정상급 연주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사중주, 트리오 듀엣, 솔로 등의 여러 형태로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그의 가족은 로스 로메로스(Los Romeros)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57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이민을 한 후 그들의 미국에서의 첫 공개 무대출연은 1961년이었고 그로부터 매년 100회에 가까운 연주회를 가져 왔다. 그들은 셀레도니오를 비롯하여 셀린, 페페, 앙헬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플라멩고만을 연주하였으나 현재에는 바하와 비발디로부터 집시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들의 즉흥연주는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솜씨로 인정되고 있고, 그들의 앙상블은 완벽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개개인의 기량 역시 여느 연주자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로드리고가 1967년에 `4대의 기타를 위한 안달루시아 협주곡`을 작곡, 헌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페인의 현대작곡가인 로드리고(Joaquin Rodrigo)는 그들을 위하여 「4개의 기타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여 주기도 하였다. 로메로 일가의 아버지인 셀레도니오 로메로는 작곡도 뛰어나서, 페페나 앙헬이 자주 연주하는 `말라게냐`, `탱고 안젤리타`, `안달루시아 조곡` 등은 그의 작품이다. 첫째인 셀린 로메로는 로스 로메로에서 가족을 서로 융화시키고 이끌어 가는데 능하고, 둘째인 페페와 셋째 앙헬은 연주력이 뛰어나다. 특히 페페 로메로는 이미 이시대 클래식 기타 대가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힐 정도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 페페 로메로는 아버지와 함께 세빌리아의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극장에서 데뷰하였다. 그 후 1960년부터 현재까지 미국과 유럽 등을 연주여행하고 있고, 현재는 남 캘리포니아 대학 기타 주임교수로 있다. 페페와 앙헬의 듀엣 음반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또, 로드리고는 페페를 위하여 `축제 협주곡`을 작곡하여 페페 로메로가 초연하기도 했다. 페페의 연주는 상당히 쉽게 구할 수 있는데, 그는 `플렌트 주법`이라는 주법을 사용하여, 강력하고 명쾌한 연주에 다이나믹하고 경쾌한 음색의 아포얀도를 구사한다. 앙헬 로메로는 바로크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시대 음악에 대한 해석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7. David Russell, Scotland 1953 -


 현존하는 기타리스트중 일급연주자로 손꼽히고 있는 기타리스트인 데이비드 럿셀은 1953년 스코틀랜드의 Glasgow에서 태어났다.음악가인 양친이 스페인령인 메노르카 섬으로 이주하여 그는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며 아버지에게서 직접 음악수업을 쌓았다.그의 아버지는 수준높은 아마추어 연주가로서, 거장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팬이었는데 러셀은 이런 환경 덕택에 LP음반을 통해 어린시절부터 세고비아의 기타음색과 매우 친숙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열여섯살이 되던 해 그는 런던의 왕립음악원에서 유명한 기타 교수인 헥토르 퀸(Hector Quine)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그외에도 바이올린, 프렌치혼 등을 배웠다. 재학중 그는 줄리안 브림 기타상을 연이어 두번 수상하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졸업후에 랄프 바우한 윌리엄스 위원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1975년에 스페인 정부로부터의 보조금은 산티에고 드 꼼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의 호세토마스에게 사사받는 행운을 안겨다 주었고 다음해에 그는Alicante기타 경연대회, 안드레 세고비아 경연대회에서 일등상과 1979년 스페인의 유명한 경연대회인 타레가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그는 같은 해에 런던의 위그모아홀과 뉴욕의 메르킨 콘서트 홀에서 데뷰를 가졌으며 런던에서의 럿셀의 연주를 들은 안드레 세고비아는 "당신의 음악적이고 기타리스트적인 테크닉에 나의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라고 격찬하였으며 우루과이 작곡가 Guido Santorsola는 그의 연주를 들은 후에 커다란 감명을 받고 럿셀을 위해 "브라질리아 소나타 No.5"를 작곡했고 Jorge Morel은 그에게 "소나티나"를 헌정했다. 그 외에도 그의 연주에 감명을 받은 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한 기타곡을 앞다투어 헌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차례 내한공연을 가져 호평받은 바 있는 그의 연주 특색은 단연코 아름다운 음색과 선율을 노래하는 풍부한 감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 있어서는 동료이자 라이벌인 마뉴엘 바루에코보다 한 수 위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명반으로는 19세기낭만파 기타곡집과 바흐, 헨델, 스카를랏티의 바로크 소나타 편곡집을 단연 추천할 수 있으나 클래식기타 전문 마이너 레이블인 벨기에의 GHA를 통해 발표되어 국내팬들에게 폭넓게 소개되지 못한 감이 있어 아쉬움이 크다. 또한 역작인 타레가 기타 명곡선집(2CD) 또한 스페인의 마이너 레이블인 OperaTres를 통해 발표되어 명성에 비해 그 연주를 들을 기회가 적은 점이 아쉬웠지만 작년에 한국에서도 발표되었다. 바루에코(EMI)나 페르난데즈(Decca)등의 다른 일급 연주가처럼 메이저 레이블에서 음반을 출시했다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후 Telarc으로 레이블을 옮겨 바리오스 명곡집, 토로바 명곡집 등을 의욕적으로 녹음하고 있어 그의 연주를 이전보다는 많이 접하게 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현재 레코딩과 리사이틀, 마스터클래스등 바쁜일정을 보내고 있으며, 그의 연주는 지금도 전세계의 많은 비평가들로 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8. Kazuhito Yamashita, Japan, 1961 --


1961년 일본에서 출생한 야마시타는 8세부터 기타수업을 시작하여 1974년 일본 나가사키, 시코구 및 도쿄에서 그의 첫 리사이틀을 가졌다. 나르시소 예페스에게 사사했으며 1977년 일본 기타인 연합회가 주최한 콩쿠르에서 1등을 했고, 곧이어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가진 국제 기타 콩쿠르에서 연거푸 1등상을 수상했다. 1979년 야마시타는 도쿄 필하모니와 콘서트 및 음반녹음으로 데뷰했으며, 일본 주요도시 순회공연에 뒤이어 파리에서의 데뷰 연주회를 가졌다. 다음해 네덜란드에서의 순회공연때 암스텔담 콘세르트 헤보우 관현악단과 협연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1982년 그는 다시 일련의 연주회를 갖기 위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984년 토론토 기타 페스티발에 우승함으로써 독일, 비엔나 및 런던을 포함한 유럽순회공연을 가질 기회를 얻었고 거기에서 음악평론계 및 언론계로부터 그의 음악적인 예술성 및 다양한 표현력에 대해 놀랄만한 찬사를 받았다. 현재 BMG레코드 전속 기타리스트로 기타로 표현하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곡들을 편곡, 탁월한 테크닉으로 연주해내 찬사를 받았으며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고, 왕성한 레코딩, 연주활동을 보이고 있다.야마시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빠른 왼손과 핑거링으로 교묘한 왼손 운지 그리고 오른손 새끼손가락까지 많이 사용해 기타를 더욱더 현란스러운 음채색으로 그려놓고 있다. 이러한 점은 어느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며 그 기교에 감탄할 뿐이다.


9. Agustin Barrios Mangore, Paraguai, 1885.5.5 -- 1944.8.7

1885년 5월 5일 파라과이 산 후안 바우티스타 데 라스 미시온네스에서 태어나 1944년 8월 7일 엘살바도르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위대한 기타 연주가이자 작곡가이다. 1900년 국립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1910년경 남미, 중남미 각지로 연주여행을 계속하였던 그는 1916년 브라질에 가서 15년간을 지내기도 하였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가장 위대한 클래식기타 연주가로 세고비아를 들지만, 세고비아 자신은 망고레를 회상하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세고비아가 남미를 여행할때 망고레의 기타연주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의 연주를 보고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망고레는 1922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예노스아이레스에서 처음으로 A. Segovia를 만났다. A.Segovia는 이때 Barrios에게 기타 음악해석에 따른 조언을 요구했는데 이때 Segovia는 Barrios의 기타주법(양손의 독특한 Touch)을 자신의 기술로 만들었다. 유명한 스페인의 기타 제작가 Santos Hernandes는 그의 회고록에서 "Segovia는 망고레의 연주와 그로부터의 조언을 받고서야 완전히 그 테크닉을 완성하였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Mangore라고 하는 이름은 파라과이의 대삼림(大森林) 속에 살고 있는 대추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서 Nitsuga Mangore(註;Nitsuga를 거꾸로 읽으면 Agustin이 된다.)로 만들었다. Barrios는 기타 작곡가, 철학자, 신학자, 시인이었고 또 여러나라 말에 통달하였다. 그는 바하를 열심으로 연구하였지만 시종 민족성의 토대 위에 그의 음악을 승화시켰다. 그의 음악에 있어서 중요한 공적은 아메리카 대륙의 민족학교 에스쿠엘라 망고레아나(Esucela Mangoreana)를 창설하고 스페인 기타계의 움직임에 대하여 남미의 민족색이 넘쳐 흐르는 곡을 예술적으로 높여가는 운동을 볼 수 있었다는 공헌이 있다. Barrios의 기타음악에 대해 작품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Segovia 뿐만 아니라 H.Villa-Lobos(브라질의 위대한 작곡가, 기타리스트)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Barrios의 작품 "사랑의 고백(Congession)을 듣고 그 영향을 받아 Villa-Lobos는 전주곡 1번(e minor)을 썼고, "향수의 초로(Choro da Saudade)를 듣고 "Choro Tipico#1"을 작곡했다. 또 미구엘 쵸베는 Barrios에 대하여 "Barrios는 `Estudio de Concierto`에서 기타 역사상 100년 후에나 겨우 보편적으로 될 것을 단숨에 해결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어서 위대한 악성으로 존경받고 있는데 기타 연주의 초인적인 그것은 아마도 그의 깊은 교양과 숭고한 인간적 정신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망고레가 작곡한 곡들은 한마디로 너무나 아름답고 장엄해서 존 윌리엄즈의 연주 레코딩과 많은 현대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앨범 및 연주가 있었지만, A.segovia는 그때 이후 그에 대해 경원하는 마음에서인지 그의 작품은 일체 연주된 판이 없다. "La catedral(대성당)"과 "Ras Abejas" 는 그의 좋은 작품으로 색체나 음향의 전달성은 끊임없이 흐르는 무궁동기법의 빠른 텀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곡이 좋은 보기가 되겠지만 어떠한 곡이 대부분 음계(스케일)적이라 해서 아포얀도로만 연주해선 안된다. 결국 아포얀도의 남용은 속도에 제한과 음색의 다양성에 부족을 가져다 주며 기술상 오른손 놀림의 곤란을 감수해야만 된다. 이것들은 아포얀도로도 되겠지만, 슬러의 첫 머리만 아포얀도로 탄주했을 때와 음색의 다양성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그는 전세계적으로 세고비아보단 알려지디 않았지만 세고비아를 능가하는 위대한 클래식기타 연주가, 작곡가일지도 모른다.



10. 모레노 토로바 Federico Moreno Torroba(1891)


부친은 유명한 오르간주자로 그의 지도하에 음악생활을 시작한 Torroba는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마드리드 왕립 콘세르바토리오에서 수학했다. 알베니스, 그라나도스, 팔랴, 튜리나 등 스페인의 많은 작곡가들이 프랑스에 유학하여 대성하였으나 토로바만은 젊은 시절 프랑스에 가지 않았다 한다. 그는 스페인에 머물러 작곡에 열중하였는데 처음 오케스타라곡을 많이 써 스페인 독특한 오페레타, 즉 [사루스에라]같은 작품은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뒷골목 처녀] [가라바의 여자와 몬테가르메로] 등이 그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타를 갖고 있었으나 1920년에 처음 세고비아의 연주를 듣고 세고비아를 위하여 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세고비아 자신도 토로바를 자기에게 협력해주며 레파토리를 넓혀준 최초의 작곡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토로바의 곡에는 Sonata, Concerto와 같은 형식악도 있으나 그와 같은 어려운 곡보다는 스페인 무곡과 민요를 주제로한 것중에 보다 좋은 작품이 있다. 그는 맹인 작곡가 로드리고와 함께 만든 2막 오페레타 [푸른 악마(Elduend Azul)]도 남기고 있다.


11. 괴란죌셔 (Goran Sollscher)


괴란 죌셔는 1955년 스웨덴 출신의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1978년 열린 20회 파리 국제 기타 콩쿠르에서 직접 고안한 11현 기타를 가지고 자유곡으로 바흐의 `Prelude-Fuga-Allegro, BWV 998"를 연주하여 20회 파리 콩쿠르를 석권하였는데, 그가 연주한 이 곡은 청중을 완전히 압도하는 연주로 기교와 음악성 모두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 많은 기타 팬들은 그의 바흐연주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그의 연주는 대개 그가 고안한 11현 기타로 연주되다. 이것은 그가 파리콩크르에서 우승한이래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11현 기타는 스웨덴의 기타 제작자인 게오르그 볼링이 제작한 것으로 기본 조현법에 있어서부터 다른 다현 기타와 틀리다고 하는데 그것은 보통 기타 보다 3도 높게 조현되며 7번-11번현은 반음계로 진행되어 조율된다고 한다. 그리고 연주는 7번 현까지는 실제적으로 줄을 눌러 연주하는 반면 그 위의 줄들의 개방현만으로 연주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의 11현 기타는 왼손의 부담을 줄이고 양질의 저음을 얻을 수 있는 이점외에도 르네상스 류트나 바로크 류트를 위한 작품도 별다른 수정없이 연주를 할 수 잇다고 한다. 그러나그의 연주가 11현 기타에만 한정되는 것만이 아니고 6현 기타를 사용하여서도마찬가지로 뛰어난 연주를 보여 준다. 현재 괴란 죌셔는 독일 등 지에서 아주 뛰어난 연주가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음악은 고전적인 곡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근래에 `기타로 연주한 비틀즈`라는 음반을 내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최근의 마누엘 바루에코와 함께 비틀즈를 클래식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음악의 지평선을 확장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2. 호아퀸 로드리고 JOAQUIN RODRIGO (1902)


기타아를 위한 <아란훼스 협주곡>를 내놓아 세계에 이름을 떨친 화퀸 로드리고는 1902년 바렌시아 근처인 사훈토에서 태어난 스페인 음악가이다. 3살 적 장님이 된 그는, 어려서부터 바렌시아 음악원의 후란시스코 안티오크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유럽여러나라를 여행한 직후 작곡한 그의 첫 데뷰곡인 교향적 스케치<홍굴라레스>는 1924년 바렌시아 교향악단이 초연해 호평을 받았다.1927년 파리로 간 로드리고는, 뒤카에게 작곡법을 배우고, 화야와 친해졌으며, 음악의 필수 동반자인 터키 피아니스트 캄히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후 모리스 엠마뉴엘과 앙드레 삐로에게 음악학을 계속 공부한 뒤, 1939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아란훼스 협주곡>을 작곡, 사인스 델 라 마사에게 헌정.초연해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로드리고는 기타아를 연주할 줄은 몰랐지만, 이 악기의 독특한 작곡기법으로 <즐거운 소나타>와<스페인 소나타>등을 작곡했고, 매우 포플러한 <토니딜라와 환딩고> 2중주곡과 노래와 함께 연주하는 <휠리아스>.<카나리아스>.<3¡Æⓒøac>등이 유명하다. 더우기 로드리고의 기타아 협주곡들은 현대 세계에서 최고 정상급으로 꼽히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음량이 적은 기타아일지라도 특성을 잃지 않고 오케스트라아와 멋진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의 작곡기법은 스페인 특유의 리듬과 민요와 카덴짜를 바탕으로 하지만, 프랑스 인상주의에 기우는 형틀과 신고전적인 화성과 가락, 그리고 현대 불협화음을 사용함으로써 18세기 이래 스페인 국민음악과 선배들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국제성을 띄워 풍융한 음악으로 빛을 발하며 치달았다. 1954년에 작곡된<어느 귀 신사를 위한 환타시아>는 세고비아에게 헌정.연주된 곡이지만, 17세기 선배대가 가스파르 산스를 위해 쓴 작품으로도 보고 있다. 한편 성음에서 내놓은<축제 협주곡>도 유명하며, 기타아와 바이올린을 위한<여름 협주곡> 그리고 첼로를 위한<경쾌한 풍의 협주곡>도 잘 알려진 곡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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